Memory/Story

김바니님 드림 해석 커미션 (@hellxblxxming)

 

쿠로오와 로하는 위태로운 흔들다리는 걷고 있습니다. 쿠로오가 졸업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만날 수 있는 날이 적을 테니 최대한은 학교에서 얼굴을 보려고 할 텐데, 겨울로 접어든 11월부터 쿠로오도 로하도 어느 마음 한켠으로는 알고 있어요. 이 관계의 길이 더 이상 전처럼 마냥 달콤하지만은 않다는 걸요. 이맘때의 이로하는 곧 3학년에 접어들 테니 자신의 진로에 대해 한창 고민하던 즈음일 겁니다. 그러던 와중에 기분전환을 하려고 나갔던 시내에서 모델 제의를 받고 몇 번 테스트 촬영을 하게 되는데, 그 엔터테인먼트에서 새 아이돌을 기획 중이었던지라 로하에게 아이돌을 할 생각이 없냐고 제안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빛나는 누군가를 애정하고 찍어주는 포지션에 가까웠던 이로하는 자신이 “빛나는”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가정만으로도 가슴이 벅찼으면 좋겠어요. 그동안 무슨 일을 하던 전부 시큰둥했던 것도 이런 반짝이는 일을 하기 위해서였구나! 할 정도로 가슴 설레 할 것 같기도 하네요.

 

 

하지만 아직은 부모님과 할 얘기도 많고, 로하도 자신의 진로이다보니 조금 더 깊게 생각할 여지가 있었기 때문에 부모님을 제외하고서는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으리라 싶습니다. 다만 쿠로오에게는 알려주고 싶은 마음도 조금 있었을 것 같은데, 둘의 관계는 보시다시피. 졸업 직전이다보니 배구부 인수인계며 취업계며 이것저것 할 일이 많은 쿠로오와 그런 쿠로오의 한발짝 뒤에서 쿠로오를 기다리는 로하는 점점 지쳐만 가죠. 쿠로오도 한편으로는 로하까지 챙길 기력이 없었을 거예요. 한편으로는 그 누구보다 가깝고 친구 같은 로하가 자신을 이해해줄 거라고 과신했을지도 모르겠네요. 로하도 물론 머리로는 이해했겠죠. 그만큼 둘 사이의 신뢰가 두터웠다는 증거인데, 신뢰가 두터운 만큼 서로가 서로의 최우선 순위가 아니라는 자각이 들 때면 배신감도 그만큼 커다랬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영부영 둘의 시간은 흘러가고, 학교에서 짬을 내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영 전과는 다른 느낌이었을 겁니다.

 

 

로하가 결국 먼저 쿠로오에게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쿠로오가 사회로 나가기 직전인 만큼 로하도 진로에 대해 진지한 시기였던 만큼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서로가 짐이 되는 이 상황이 속상한 것도 있었고, 쿠로오는 우리의 관계를 이렇게까지 여겨주지 않은 것 같으니 더 속이 상했겠죠. 아무리 장난스럽고 서로를 툭툭 건드는 것처럼 여유로운 연애를 했었어도 둘의 관계에 간극이 생길수록 조급해졌을 것 같아요.

 

- 쿠로오. 얘기 좀 해.

- 로하쨩, 조금 나중에 얘기하면 안 될까? 어제도 종일 바빠서 조금 쉬고 싶어.

- 그러니까. 쿠로는 왜 나를 만나서까지 쉬고 싶어하는 거야? 이제는 묻고 싶어서 그래.

- 하루카 씨.

- 우리 사귀는 사이인 건 알지? 쿠로가 더 이상 자각이 없는 것 같아서 물어보는 거야. 바빠서 쉬고 싶으면 약속을 안 잡으면 되는 거 아니야?

 

- … 시간 내서라도 같이 있는 시간 늘리자고 했던 건 로하쨩 아니십니까? 여기서 말꼬리 늘려서 누가 이득을 보는 거죠?

- 봐. 지금도 말로 하면 될 걸 비꼬고만 있잖아. 만나서 이럴 거면 뭐하러 만나냐구.

- 그래, 오늘은 내가 잘못했어. 무심했던 게 맞아. 데려다줄게. 학교 말고, 다음 주말에 다시 만나자.

- 아니야. 방금 확신했어. 우리 여기까지 하자, 테츠로. 많이 바쁘시잖아. 취업 시즌에, 졸업에. 그동안 고마웠어.

 

짧고 영양가 없는 대화가 오가다가 로하는 그동안 했던 고민들이 무색하게 덜컥 쿠로오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쿠로오와 함께 있던 카페에서 박차고 나옵니다. 쿠로오는 한숨을 내쉬면서 한차례는 로하를 따라가지만, 길거리에서 계속 같은 도돌이표 같은 말을 반복하며 언성을 높이다가 길거리에서 헤어질 것 같아요.

 

로하는 그랬을 겁니다. 너는 나를 비참하게 해, 쿠로오. 나는 별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다루는 네가 미워. 쿠로오는 집에 돌아와 로하의 말을 곱씹다가 자신이 저를 얼마나 각별하게 여겼는지 알아주지 못하는 로하를 원망했을지도 모르겠네요. 물론, 이별의 후폭풍을 맞기 전까지는요.

 

 

쿠로오가 졸업하고 4년의 시간이 지나, 쿠로오는 한창 적응에 바빴던 시기를 이기고 어느새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습니다. 배구협회에서 일한 지도 어언 4년차, 21살의 쿠로오. 사실 말처럼 쿠로오가 모든 안정감 위에 있었다고 한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쿠로오는 입사 2년차 가을날, 인생의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전에 함께 경기를 뛰고 아는 사이인 팀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모 팀에서 다발적으로 도핑 테스트에서 스테로이드제 약물이 적발되는 바람에 일본 배구협회가 난리가 난 거죠. 배구선수들의 평판이나 팀 운영은 곧 경기에 대한 문제로 직결됩니다. 쿠로오는 이 사태를 제대로 넘기지 않으면 한 차례 배구계에 큰 혼란이 올 것도 알아요. 밤낮없이 수습하고 경기 일정들을 파악하고 미루고······. 그러던 중에 쿠로오의 후임이 큰 실수 하나를 해서 쿠로오가 함께 책임지게 되는 상황도 괜찮을 것 같네요. 잠깐 외부 미팅을 다녀올 테니

 

기존에 잡혀있던 경기 날짜를 뒤로 미루거나 취소할 수 있는 경우가 있는지 체크해달라고 했는데, 후임이 전화로 경기팀과 전화를 하면서 기싸움에서 밀려서 경기 일정을 미루지도 못하고 문제 선수가 처분을 받기 전에 경기를 뛰는 참사가 발생한 거죠.여론은 심각합니다. 팀과 문제 선수에 대한 1차적인 욕이 대부분인 것 같지만, 배구협회는 겨우 이정도 일도 못하냐는 여론도 대다수라서 쿠로오는 사수로서 욕도 엄청 먹고, 시말서도 쓰고······. 후임까지 죄송하다고 인사하는 판에 특유의 군기 문화를 싫어하는 쿠로오 입장으로서 후임에게 더 뭐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거예요. 쿠로오는 정신이 아득합니다. 그나마 쿠로오의 사수가 잠시 옥상에서 자고 오라고 외근으로 자리를 비우게 해 줘서 잠겨 있는 옥상 문을 열고 벤치 위에 자리를 깔고 눈을 감았을 것 같아요. 꽤나 좋은 가을 날씨가 쿠로오 속을 더 뒤집어놨을 겁니다. 입사 4년차에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요.

 

 

쿠로오는 눈을 감고 선잠을 자다가 익숙한 목소리가 쿠로, 하고 부르는 걸 듣고 자리에서 번쩍 일어납니다.

 

- …로하쨩?

 

주변을 둘러보지만 당연히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고, 맞은편 건물의 전광판에서 화려한 무대의상과 화장에 활짝 웃고 있는 로하가 보였을 거예요. 쿠로오가 들었던 이름은 “쿠로”라는 가사를 부른 로하에 지나지 않았겠죠. 쿠로오는 가뜩이나 심신이 지친 상태에서 반짝이는 로하를 보고 더 착잡해집니다. 몇 년 전, 켄마가 이따금 전하던 소식과 대조하면 헤어졌을 즈음이 로하의 아이돌 연습생 시작과 얼추 들어맞아서 자신이 신경 써주지 못했다는 사실만 후회가 됐을 거예요. 로하가 지친다고 했던 것도 전부. 쿠로오는 이 이상 감상에 빠져드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찰나 편안했던 휴식을 끝내기로 합니다. 며칠 뒤 있을 문제의 배구 경기장에서 재회하게 될 거라는 상상은 하지도 못한 채로요. 시간을 돌려, 문제의 배구 경기날.

 

쿠로오가 고군분투한 결과 덕분에 문제의 도핑선수는 다행히 경기에 출전하지 않고 다른 선수들로 구성이 개편됐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상대 팀 팬들은 과열 되어있는 상태고, 어떤 변수와 문제가 벌어질 지 모르니 배구협회 소속인 쿠로오가 파견된 거죠. 쿠로오는 내내 긴장을 늦출 수 없습니다. 기자들도 제법 있고, 어떤 이슈가 생길지 알 수 없으니 미지에서 오는 막연한 불안함이 있었을 거예요.

 

- 어? 저기 이로하 아니야?

- 슈가팝핑?

- 우와, 맞네!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던 경기장 내부가 어느새 기분 좋은 소란함으로 가득찹니다. 경기가 진행되기 직전 객석을 비추는 카메라가 객석 어드메를 비추면 전광판에 모자를 썼던 한 여자가 모자를 벗으며 환하게 웃는 모습이 보이겠죠. 쿠로오가 며칠 전 그렸던 바로 그 이로하가, 이번에는 정말 쿠로오와 한 공간에 있습니다. 당황하고 놀란 쿠로오를 두고, 경기는 풀어진 내부의 공기를 타고 정석적이게 풀려갑니다.

 

 

한마디로 분위기가 좋아진 거죠. 예민하고 날섰던 좀 전과 다르게 로하의 등장으로 사람들의 관심사가 확 바뀐 셈인데, 로하가 그날따라 싸인과 사진 요청에 전부 응해줘서 객석 분위기가 더 좋아졌을 것 같아요. 어느 팀 팬이냐는 말에는 고등학생 때 배구를 좋아했던 편이라 “배구”그 자체를 좋아한다고 해서 편가르기 할 필요도 없었을 거고요. 쿠로오는 어쩔 수 없이 로하에게 시선이 자꾸만 빼앗기겠죠. 그리고 전반전이 끝나고 후반전 사이에 잠깐 주어진 공백의 시간동안, 쿠로오는 배구협회에 경기장의 분위기가 많이 호전되었으며 발행되는 기사들 분위기도 나쁘지 않다고 후반전까지 확인하고 가겠다고 전화로 보고를 올립니다. 한숨을 내쉬면서 쿠로오가 다시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려던 그때.

 

- 쿠로오 테츠로 씨, 잘 지냈어?

 

쿠로오는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뒤를 돕니다. 뒤를 돈 곳에 그 어느 때처럼 금발에 분홍빛 그라데이션 머리를 하고 있는 로하가 있었을 거예요. 머리가 조금 길었나.

 

- 그럼, 물론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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